3ㆍ1 운동 유림(儒林)을 위한 변호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20/09/09 [10:42]

3ㆍ1 운동 유림(儒林)을 위한 변호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20/09/09 [10:42]

  

 

1919년 삼일운동은 우리나라 조선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립국으로 지금도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한민족 또한 전통에 빛나는 자주민으로 이 땅에 엄존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피 맺힌 절규요 항쟁이었다.

 

그런데 이 장엄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연서(連書)에 유림의 대표가 빠져 있다.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유림이 삼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림이 빠진 까닭이 궁금해진다.

 

이유야 많겠지만, 아마도 각계의 민족역량을 하나로 모아나가는 제휴단계에서 유림이 처음부터 배제되어 참여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거나, 참여제의를 받고도 지나치게 신중하게 대응하다 그만 시기를 놓쳤던가, 동참권유에 시종 소극적 반응으로 일관함으로써 처음부터 전혀 뜻이 없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는 대체로 가설적 추단(推斷)이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건, 결과는 민족의 숭고한 독립선언 대열에서 유림이 이탈한 혐의를 받게 되었으니 주변의 준엄한 질책과 따가운 눈총은 말할 것도 없고, 유림의 본성과 체질상 그들 스스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유림이 어떤 존재안가? 한마디로 조선조 500여 년의 종사(宗社)를 지탱해온 이 나라 정치 사회의 중추세력이요, 유교문화를 견인해 온 이념집단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황실 관부(官府)와 더불어 옥사(屋社: 나라 사직탄 터에 여염집이 들어선다는 뜻으로 자기나라가 망한 것을 차마 망국[亡國]이라 하기 어려워 이르는 말)에 대한 도의적 무한책임도 있지만,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유림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끄는 무뢰배들에게 무참하게 시해(弑害)당한 을미사면(乙未事變)<고종 32년 1895.10.8.> 이래, ‘반일토왜(反日討倭)’의 기치를 높이 들고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장장 15년에 걸쳐 참으로 끈질기게 의병 투쟁을 전개했다.

 

※1차 의병 : 1895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를 항거, 2차 의병 : 1905을사늑약 외교권 박탈에 항거, 3차 의병 : 1907~1910 군대 해산과 합병에 항거.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수많은 유생 열사들이 비분강개, 통한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써 처절하게 항거했다.

 

이처럼 이 땅의 수많은 유자(儒者)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과 책무,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가열 차게 투쟁을 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삼일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결연한 독립의지와 자주역량이 하나로 응결되어 폭발한 거족적인 봉기였다. 그리고 이 삼일운동의 처음 조직화 단계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음에도 유림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그 뒤에 숨겨진 진실 간에는 간극이 있음을 가끔 보게 되는데, 유림의 삼일운동 불참 결과도 그러 경우라 하겠다.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간에 밝혀진 여러 자료와 연구결과를 종합 검토한 끝에 얻은 대개의 결론은 앞에서 가설적으로 제시한 유림의 불참이유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모두 개연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첫째, 삼일운동을 위해 각계와의 제휴를 모색했던 주역들이, 최초로 접촉한 구한말 일부 고위관료들의 미온적 반응에 실망한 나머지 아예 유림과의 접촉을 포기한 경우가 그렇고, 둘째, 개인적으로 참여의 뜻을 밝히고도 사사로운 사정으로 지체하다 서명 기회를 놓쳐버린 경우가 또한 그러하며, 셋째,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정황은 도외시한 채, 대의만을 앞세운 무모한 거사가 빚어 낼 엄청난 희생에 대한 우려가 일부이긴 하지만 유림 내의 소극적, 부정적 반응을 부른 것이 또한 그렇다.

 

더구나 유림은 그 조직체계가 모호하여 전국적으로 일원적 통솔력을 갖는 수직적 기구가 아니라 각 지역 종장(宗匠)을 중심으로 하는 수평적 체계라는 점도 <3.1거사>에 불참한 요인이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즈음 유림을 대표할 만한 인물로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 1835~1920)이 있었다.

 

김윤식은 일찍이 <민족 자강론>을 펼친 개화 사상가로 대한제국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각료(외무대신)였다. 운양은 오랜 고심 끝에 삼일운동을 이끄는 다른 종단과 제휴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불참 결정은 단순히 당시 민족감정의 흐름으로 보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책임하고 반민족적인 행위로 보이기 쉽다.

 

조선조 오백년의 종사(宗社)를 지키고 이끌어온 주체가 유림인데 하물며 독립항쟁 거사에서 발을 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림이 앞장을 서지 못한 것은 기나긴 의병투쟁과정에서 기력을 소진한 탓도 있겠지만 기왕에 천도교와 기독교 중심으로 추진되어온 <3.1거사>에 생색이나 내려고 뒤늦게 참여하기보다는 차라리 공식적, 조직적 참여는 하지 않되 개인적 판단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도리라는 논리였다.

 

실제로 삼일운동이 단시일 내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역 유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전국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항쟁에 나선 것을 부인하거나 그 역할을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후 1926년 순종황제 인산(因山) 국장(國葬)을 계기로 봉기한 6.10만세운동을 유림이 독자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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