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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기획보도…제5탄, 꼬부리 정승 맹사성과 맹씨 행단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7/07 [11:17]

[특집]탐사기획보도…제5탄, 꼬부리 정승 맹사성과 맹씨 행단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7/07 [11:17]

태종의 부마 치죄하는 정의감과 서민적인 삶이 몸에 밴 정승

조선 최장수 좌의정으로 청백리에 올라 공직자 청렴성의 표상

 이명우/충남학 강사 협회장

낮잠을 가다가 집 뒤뜰 배나무로 용이 올라가는 꿈을 꾼 최영 장군은 황급히 일어나 나가보니 왠 꼬마가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 최영 장군이 그 꼬마를 부르자 그는 도망가지 않고 최영 장군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그를 유심히 살펴본 최영 장군은 그 꼬마를 손녀의 배필로 삼았다.

 

맹씨 행단에서 전해지는 설화의 일부다.

배를 따던 꼬마가 바로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이다.

최영 장군이 낮잠을 자던 집은 오늘날 맹씨 행단으로 불리고 있다.

 

그 옛날 맹사성이 올랐던 배나무는 사라지고 없지만 성하의 날씨에 맹씨 행단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와 함께 푸르름을 더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야산의 초입에 자리한 맹씨 행단!

원래 이 집은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최영 장군의 사가다.

 

최영 장군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자 빈집이 되었다. 이 집에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인 고불 맹사성이 살게 된 것이다.

 

 맹씨 행단

고불 맹사성의 할아버지는 맹유로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두문동 명현의 일인이다.

 

아버지 맹희도 역시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부자 모두 두문동 72현에 이름을 올렸다.

 

신창 맹씨의 시조는 중국의 사상가 맹자(孟子)이며, 고불은 신창 맹씨의 중시조인 맹의(孟儀)4세손이다.

 

고불의 아버지 맹희도(1337~?)는 호는 동포(東浦)로 고려 공민왕 14년에 때 로 문과에 급제해 포은 정몽주(1337~1392), 야은 길재(1353~1419), 양촌 권근(1352~1409) 등과 교유했으며 아들 맹사성은 권근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12(1386) 문과에 급제해 예문 춘추관 검열, 전의승, 기거사인, 우헌납 등을 지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 수원판관, 내사사인, 예조정랑, 시어사, 간의 등을 지내고 1406년 이조참의, 예문관제학을 거쳐 진전사로 명나라를 다녀와 한성부윤이 됐다.

 

최영 장군의 외손녀사위였지만 태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처형하지 않고 등용한 까닭에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달리 조선조에 들어서도 관직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태종의 허락도 없이 부마인 조대림을 국문해 유배되어 사사될 위기에 처했으나 영의정 성석린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었고 1416년 호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1419년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1425년 명나라를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가 되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 때 좌의정이던 황희의 청탁으로 호조판서 서선의 아들이자 황희의 사위인 서달의 아전 폭행치사 사건을 눈감아주려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했다.

1430년 태종실록을 감수하고 1431년 좌의정으로 춘추관영사를 겸임해 팔도지리지를 찬진하고 1435년 사임한 뒤 1438년 졸했다.

 구괴정

맹사성은 세종의 문화시대를 황희와 함께 이끈 쌍두마차였으며 정승으로서 서민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또 목민관으로서 안동에 재임 중 고을에 젊은 과부가 많은 것을 알고 원인을 파악해 낙동강변에 나무를 심고 물길을 돌려 젊은 남자들이 일찍 죽는 것을 막았다.

그의 행적과 관련 인침연(引沈淵)에 대한 설화나 공당놀이 그리고 안동설화 등 서민적 풍모를 내비치고 있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淸白吏)로 오늘날까지 공직자의 청렴성의 표상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호 꼬부리(古佛, 허리가 휜)가 나타내듯 권위적이지 않고 공당놀이처럼 각계각층과 소통에 나섰으며 조대림 사건이나 세종이 실록을 보고자 했으나 거절한 사건 등에서 나타나듯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선비상 등은 그의 공직자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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