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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 기획보도…제14탄, 여제(女帝) 소서노와 백제(百濟)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9/09 [11:10]

[특집]탐사 기획보도…제14탄, 여제(女帝) 소서노와 백제(百濟)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9/09 [11:10]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시인 김 인 희

 

필자는 백제의 후예로서 백제의 왕도 사비성(부여군)에 살고 있다. 부소산성과 궁남지는 필자가 즐겨 찾는 산책로다. 수년 동안 국립 부여박물관 전시유물 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한 이력을 훈장처럼 간직하고 사비성(부여군)에 살고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말도 많다.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 멸망한 나라라는 이유로 승자에 의해 억울하게 왜곡된 부분에 대해 역설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충남신문과 충청창의인성교육원에서 충청남도 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 집중 탐방 기획보도의 장을 마련하여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제 소서노

소서노(召西奴)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아내이자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어머니다. 이를테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남긴 여제(女帝)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조의 기록에 따르면 고주몽(동명성왕)이 처음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졸본에 이르러 졸본 왕의 딸 3명 중 차녀와 결혼했다가 졸본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고, 그 사이에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고 한다.

 

 

소서노는 동명성왕이 처음 고구려를 건국하고 창업의 기반을 열 때 내조하며 이를 도왔다. 기원전 194월에 부여에서 아내 예 씨가 낳은 친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동명성왕의 태도가 급변하여 유리를 후계자로 정하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후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동생인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다. 처음에는 '십제(十濟)'였다가 후에 백제(百濟)가 되었다.

 

백제(百濟)는 구다라, 백제국(伯濟國), 남부여(南扶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 한반도 중부에 있었던 고대국가로 기원 전후에 부여와 고구려계 이주민 집단이 중심이 되어 마한 50여 개 소국 중의 하나로 출발한다.


근초고왕 때는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고 최전성기를 이룬다. 이러한 국력 성장의 기반 위에 이 시기부터 중국의 남조 및 왜 등과 해상교류를 통해 백제 문화는 보다 세련된 국제성을 띠게 되었으며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원조 한류의 시초가 백제였다고 주창하고 싶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을 빼앗기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된 백제는 475년에 웅진(충남 공주시)으로 수도를 옮겼다.

 

 성왕상(충남 부여군 소재)

성왕(재위 523~554) 시기 웅진보다 넓고 교통이 편리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으며,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쇠퇴하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노력하였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매우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는 642년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장군 윤충을 보내 요충지인 대야성까지 함락하였다.

66013만 대군을 실은 당나라의 수많은 배가 덕적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신라군과 합류했다. 당군은 우선 금강 하구로 진격하였으며, 신라의 5만 군사는 황산벌로 진격했다. 백제는 황급히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5만 대군에게 전멸당했고, 금강 하구에서도 당군을 막지 못하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3일 만에 함락되었다.

 

 백제 금동 대향로(국립부여박물관 전시)

백제의 운이 다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수에 백제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황산벌 전투에서 5만의 나당 연합군에 맞서 싸운 계백장군의 군사는 5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백 장군과 백제군은 결사의 각오로 전쟁터로 달려갔다.

 

승자에 의해 기록된 의자왕에 대한 역사는 참혹하게 왜곡되었다. 의자왕이 태자 시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으며, 집권 초기 신라의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킨 용맹한 군주였다는 기록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3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오명으로 덮어씌웠다.

 

백제는 한반도의 중심으로 무게를 잡고 중국과 교류하고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멀리 인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한류의 시조였다는 것을 다시 역설한다.

백제의 정신이 한반도의 중원 충청도의 정신에 고스란히 이어져 흐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충청도 만세!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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