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 시절 우리의 가정마다 책장에 ‘인간경영’이라는 책들이 꽂혀 있었고 그 책의 주인공은 1603년 에도막부를 세우고 260년간 일본 열도를 지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된다. 일본 전국시대 통일의 기초는 오다 노부나가, 통일의 잔치상차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잔치상의 주인은 도쿠가와가 차지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승만이 나라를 어렵게 세웠고 박정희가 잔치상을 준비하였으며 전두환이 그 잔치상을 차지하였다고 세평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사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범은 수없이 전개되었는데 큰 전쟁은 1592년 임진왜란과 1897년 정유재란이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두드러지는 존재는 사무라이이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고 그 대가로 영주로부터 봉토를 부여받아 그 지역의 소지주로 살아가는 신분적 중간계층에 속하였다. 각 지역 영주들이 영토를 넓히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수시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사무라이들의 역할은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전국 통일된 이후에는 천황 아래 쇼군의 직위를 설치하여 영주들이 그 휘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서로 전투할 일이 없어지게 된다. 전투가 없어지게 되었다는 상황은 곧 사무라이들의 생계에 위협이 되었고 그들의 동요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목적의 정한론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당시에는 도요토미가 집권하던 시기이었고 도쿠가와는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조선침략 전쟁에 당연히 도쿠가와도 참전을 해야 하나 전쟁 참여를 거부하였다. 결국 노년의 도요토미는 자신의 군사 만을 이끌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결국실패한 후, 6세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그 이후에는 도쿠가와의 세상이 전개된다.
그리고 천황이 거주하던 교토를 떠나 현재 동경(에도) 지역으로 수도를 정하고 과거의 서해가 아닌 동해를 바라보며 태평양시대를 열어나갔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조선통신사를 통하여 정중한 예우와 양국의 외교를 다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도에 대하여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우애를 실천한 것이다. 실제로 260년간 에도막부 시기에는 조선에 대한 침략이 없었다.
아무튼 현재에도 도쿠가와의 독특한 국가경영 철학은 연구대상이 되고 근검절약정신의 동양적 표본이 된다. 천하를 통일한 그는 3가지의 경영원칙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꽃과 열매를 한꺼번에 주지 않는다’이다. 참모들에게 권력과 돈을 한꺼번에 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상인의 검소한 생활과 계산능력을 배운다’ 도쿠가와는 천하를 쥐었지만 보리밥을 먹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셋째 ‘불가근불가원, 원교근공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워지기 위하여 노력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서 형평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암살범은 측근이 많았다는 측면이 이를 대변한다.
이제는 세상이 많이 변하여 물자가 풍족하고 삶의 품질이 높아지고 있어서 자유와 민주, 자본주의의 혜택을 폭넓게 누리고 있으나, 그러한 풍요는 사회적으로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정직한 경쟁, 분명한 공. 사 구분에 따라서 얻어지는 대가일 때 그 가치는 만인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통하여 얻어지는가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명예를 통하여 존경받고 싶고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의 축적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지만, 정치와 정부의 권력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거나 부정한 사건에 개입함으로서 얻어지는 부수입이나 부정한 금품 수수에 대하여는 철저한 단속이 절실하다. 일정한 권력 (꽃) 을 갖는 것만으로도 개인적으로 영광인데 그에 더하여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열매 (돈) 까지 주어진다면 당연히 국민적 형평성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위와 같은 도쿠가와의 경영철학이 260년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삼스레 타산지석의 교훈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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