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순인데도 햇살이 따갑다. 내포신도시를 지나고 있는데, 차창 너머로 완전히 신세계를 보는 것 같다. 잘 꾸며진 도로와 공원, 다양한 모습의 대형 주거 단지, 그리고 각종 위락시설이 과거에 지나치면서 본 홍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포신도시(충남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와 예산군 삽교읍 목리를 중심으로 조성된 신도시, 충남도청과 충남교육청, 충남지방경찰청, 충남도의회 등의 이곳으로 이전하였다)의 모습은 세종이나 동탄에 부족하지 않았다. 잘 정비된 도로와 산밑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위락시설 등은 살고 싶은 도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포신도시를 지나 조금 더 가니 홍성의 옛모습이 드러난다. 예전에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던 한우집도 생각나고, 장난스레 동헌에 앞에서 엎드려 엉덩이를 맞던 곳도 떠오른다. 홍성의 역사를 알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박물관에 가 보았다. 뭐 하나 허투루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홍성을 알려면 반드시 가 보아야 하는 곳으로 추천한다. 다시 옛 홍성관아 앞으로 가니 엄청나게 크고 잘생긴 나무가 반긴다. 작은 연못과 어울려 정자도 과객이 즐기기에는 흡족하다.
홍성에는 인재가 참으로 많다. 필자가 박사학위논문으로 쓴 만해 한용운(1897~1944) 선생을 비롯하여, 성삼문, 김좌진 등이 태어난 곳이다. 한용운 선생은 1979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여 젊은 시절에는 마을에서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친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행목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동학운동을 계기로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다른 세계를 공부하고자 하여 블라디보스톡, 시베리아 등지를 유람하고, 1905년 재입산하여 백담사에서 연곡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게 된다.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으나, 당시 불교계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고 자손을 보아야 한다는 등의 논설이 당시의 불교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을 상실하자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갔다. 이곳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일에 전력하였고, 1918년에 <유심>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1944년 일본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이은 집 심우장(성북동 조재)에서 중풍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골은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결성에는 만해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만해 생가에서 조금 올라가면 성삼문(1418~ 1456)과 김좌진1889~1930) 장군의 생가가 있다. 이 집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는데, 이 두 분의 외가가 이 집인 모양이다. 훌륭한 학자와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우선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고, 명나라에 왕래하며 음운 연구에 몰두하였다. 훈민정음의 반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세조가 단종으로 축출하고 왕이 되자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후에 성승, 하위지 등과 함께 능지처형을 당했다.
김좌진은 본관이 안동이며, 호는 백야(白冶)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토지를 노복들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1907년 8월 1일에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구국운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비밀결사 신민회 가입,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애국 계몽운동에 투신하여 많은 활동하였다.(다음 백과 참고) ‘김좌진 장군’ 하면 청산리 전투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에 펼친 그의 애국운동은 역사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어서 홍성의 자랑거리다.
홍성군은 과거부터 지리도 좋고, 기후도 괜찮아 이름있는 사대부들이 살 만한 곳으로 여겼다. 홍성군의 주요 시가지는 중북부의 홍성읍과 북부 홍북읍에 조성한 내포신도시, 남쪽으로 광천읍이 있다. 광천은 토굴 새우와 김이 유명하다. 홍성읍은 군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예산, 청양군과 인접하여 서부쪽의 생활권을 구성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이 충남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홍주’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이농 현상으로 인해 주생활권이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내포신도니는 전술한 바와 같이 홍성군 북부와 예산군의 일부를 포함하여 새로운 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각종 관공서들이 늘비하게 있어 상당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도청이나 교육청이 들어 온 시기와 연관해 볼 때 아직 발전의 속도가 느린 것도 사실이다. 세종시처럼 좀더 많은 인구가 들어와야 대형 상권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병원이나 학교 시설도 아직은 조금 열악하다. 도청이 자리 잡고 있는 만큼 발전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광천읍은 홍성군의 남부에 자리하고 있다. 홍성읍에 비해서는 조금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조선 후기 옹암포구와 일제 강점기 장항선의 건설 이후부터 광천역 주변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였고, 서해 도서지역(안면도, 원산도, 외면도)의 수산물을 육지로 이동하는 농수산물 교역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현재 옹아포구와 옹암장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광천장은 맥을 유지하고 잇다.
홍성군의 인구추이를 살펴보면 1966년에는 152,362명, 1970년도에는 141,20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서서히 이촌 현상으로 인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 서산군 고북면 대사리를 홍성군 갈산면에 편입하였고, 1989에 안면군 죽도리를 홍성군 서부면에 편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여전히 줄어 1990년에는 105,399명에서, 2024년 7월 현재 98,501명으로 집계되었다. 내포신도시가 활성화되고 상권이 살아나면 조금 증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주변의 농촌 마을은 계속해서 감소하는 추세로 인구 증가에 어려움이 있다.
홍성군에서는 ‘자살예방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두호 목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홍성에서 자란 연유로 해서 홍성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인구 감소와 자살 증가에 대한 우려와 비혼, 무자녀, 이농 현상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요약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홍성은 충절의 고장이고 선비의 고장인데,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즉 인구가 감소하는 현상이 지나치게 빠르다. 이에 대한 의견으로 다양한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홍성에는 각종 단체와 문화행사가 있지만 이러한 단체에 대한 지원이 현실적이 않은 것이 많다. 특히 자살예방은 등은 중요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연예인을 불러 놓고 하루 즐기고 마는 것보다는 군민들의 의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투자 없이 발전을 기약하기는 어렵다.
홍성은 논농사도 중요하지만 상업의 중심지였다. 광천이나 내포 등이 모두 상업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내포라는 말이 알려주듯이 그곳은 포구가 유명한 곳이다. 포구는 농수산업이 모두 모인 곳으로 다양한 물질문명, 문화 행사 등이 있었을 것인데, 그러한 것을 발굴하지 않은 것에 문제가 있다. 군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도농을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계발해야 한다. 특히 홍성 읍성은 잘 보존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으나 아직 그에 따른 행사가 부족하다. 많은 사람이 와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장기적인 행사를 기획해야 한다.
사람들은 한우 하면 횡성 한우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원래는 홍성 한우가 더 유명하다. 질 좋은 한우가 많이 나오는데, 홍보 부족으로 횡성 한우에 밀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홍성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널리 알려야 한다. 또한 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마련하여 내포신도시만이 아닌 홍성군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교육하기 좋은 도시 홍성, 선비들의 고장 홍성, 충절의 고장 홍성인데 자꾸 과거를 잊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두호 회장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이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의 정치 상황과 과거의 충신 열사를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은 필자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다만 현실적으로 목회도 해야 하고 자살방지 강의도 해야 하는 여러 가지의 일들이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바람직한 역할이 필요하다. 특히 자살을 방지하고 저출산을 고출산으로 바꿀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것이 경제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 먼저 해결하면 될 것 아닌가 모르겠다. 홍성만이라도 아이를 낳으면 군에서 대학까지 보내주면 될 것 같은 작은 희망을 안아 본다. 독일에서는 박사까지 무료로 공부한다고 하니, 홍성군민만이라도 박사까지 지원해주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물론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는 세금 없이 온전히 민생에만 투자한다면 아이 교육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울까? 김두호 원장의 말에 공감을 표한다.
홍성군에 관한 문학은 만해의 문학세계와 <조선불교유신론>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님의 침묵>에 들어 있는 ‘님’의 의미와 성격, 그리고 님의 침묵이 각각 한 편의 시라기보다는 88수가 하나의 긴 연작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여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하면서 끝나는 <님의 침묵>은 확실하게 하나의 긴 연작시이면서 또 각각 단편의 시이기도 하다.
만해와 성삼문, 김좌진 등의 고향 홍성은 분명히 충절의 고장이다. 선비의 고장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떠나려고만 한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와 교육투자로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어야 한다.
홍성에서의 인터뷰는 많은 여운을 남겼다. 앞으로 농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문화와 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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