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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선생님 나의 선생님

공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유영덕

편집부 | 기사입력 2017/09/15 [11:50]

[기고] 선생님 나의 선생님

공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유영덕

편집부 | 입력 : 2017/09/15 [11:50]
▲    공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유영덕
나는 지난 스승의 날, 조퇴를 한 후 서울에 살고계시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만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본지에 소개된 이후, 52년 만의 사제 간 상봉은 당사자뿐이 아닌 주변인들에게도 관심거리였나 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잘 다녀왔느냐?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 등의 질문공세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차제에 이곳에 후기를 실어,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선생님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52년 전의 그 정갈한 자태로 반백의 제자를 반겨주셨다. 제자의 큰절을 한사코 사양하다 맞절로 응수하신 선생님은, “날 알아보겠느냐?”고 물으셨다. 늙어서도 철이 덜 난 제자는 “어디에서 여러 번 뵌 것 같은 인상으로 남아있다.”고 어색한 답을 했다. 1966년 2학년 5반 6번 개구쟁이는, 선생님께 쓴 편지와 당시의 졸업앨범을 꺼내어 놓았다. 50년의 세월을 견디어 낸 낡은 타임머신은, 빛바랜 흑백 풍경의 교정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반백년을 삭혀둔 농익은 대화는 사제 간의 감성세포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순간의 공감에 눈시울이 젓고, 기억이 다른 엇박자에는 박장대소를 했다. 무심한 세월이 제자들의 모습을 지웠다면서도, 공주에서 제일 큰 음식점집 딸이었던 당시의 내 짝꿍을 기억하고 계셨다. 선생님들 사진 난에서는 신이 나셨다. 손으로 짚으시며 “이사람, 이사람, 이 사람은... 이 세상사람 아니야!” 살벌한 대화마저도 더 없이 정겨운 시간이었다.

사진으로 준비한 내 생활기록부의 일부를 보시고는, “내 글씨가 맞다.”고 손뼉을 치시며 좋아라하셨다. 초등학교 입학 2년 만에 선생님께 처음 들어본 칭찬, “어쩜 그리 그림을 잘 그리니?”는 내게 없었던 미술이라는 DNA를 만들어 내었다. 그 후로는 미술 대회에서 간간히 상을 받기도 하고, 대학에서의 전공도 미술을 택했으니 말이다. 조작된 DNA도 유전이 되는지, 딸아이도 미술대학을 나와 그쪽의 직업을 가졌다. 정이 담긴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우리 가문을 미술계로 이끌어 주셨다 해도 틀리지 않다.

1학년 때 장래의 꿈을 발표하는 시간,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라는 꿈은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의 몫이었기에, 그때 내 성적으로는 과한 꿈이었다. 친구들의 분위기도 그다지 허용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꿈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에~이~! 하는 비아냥이 두려워, ‘양유(당시에 아버지가 가끔씩 사주셨던 양젖) 배달원이 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서러운 답으로 친구들의 비난을 피했었다.

2학년 때, 곽영란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에게 선생님들이란 마냥 무섭기만 한 존재였었다. 하지만 곽선생님은, 지저분하고 눈치만 살피는 말썽장이에게도 애써 칭찬꺼리를 찾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것이다. 그러니 2학년 때에는 선생님의 비호 아래, ‘나의 꿈은 선생님!’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친구들의 박수도 받았다. 세월이 흘러 그 제자가 꿈을 이룬지도 35년, 이제야 그리운 선생님을 찾아뵙는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팔순의 선생님 눈에는, 환갑의 제자가 아직도 마냥 어린애인 것 같다. 아파트 길 건너 사거리 까지 쫓아 나오셔서 우회전, 좌회전을 손짓하시면서 고속도로 입구를 안내하신다. 내비게이션마저도 미덥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화분은, 아직도 못다 하신 제자사랑 실천을 이어달라는 분부로 생각한다. 게다가 “영란”선생님께서 보내시는 선물이니, 청렴실천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선생님은, 또 한 분의 어머니시니 어찌 든든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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