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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의 충청도역사 칼럼

1. 내포(內浦)의 꿈, 내포의 사랑

홍광표 기자 | 기사입력 2018/07/18 [17:56]

이청의 충청도역사 칼럼

1. 내포(內浦)의 꿈, 내포의 사랑

홍광표 기자 | 입력 : 2018/07/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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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청 (소설가 한학자)

 택리지의 충청도 기행은 내포에서 절정을 이룬다. 내포는 충청의 서쪽 지역으로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삽교천등의 큰 하천과 해안에 인접한 탓으로 바닷물이 골속 골속까지 들어와 항로가 경기도와 한양 그리고 호남으로 열려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역사서 삼국사기에도 내포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충청도는 내포가 최고다.

공주에서 2백리 길이고 가야산과 주변으로 크고 작은 들판이 있다. 들에 포구가 있는데 유궁진이다. 이 지역주변 열 고을이 내포다.

 

이중환은 내포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낀 모양이다. 내포는 충청의 명산인 가야산과 오서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퍼져 있어 평야와 해안 그리고 산록이 어우러진 천혜의 지역이다. 내포는 일찌기 이런 천혜의 지역적 특성으로 충청의 곡창이자 한반도의 곡창으로 기능했다.

 

이중환은 충청의 중앙 내륙과 동북쪽을 다녀 온 후  내포 여행에 나섰다. 그는 내포의 장점을 삼남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바다를 통한 교통의 발달을 꼽았다. 삼남대로는 교통의 강점이 있으면서 국가 위급시 전쟁등의 참화를 직접적으로 받는 약점이 있다. 내포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가야산에서 부터 내포를 풀어 간다. 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오천에서 영보정에 올라 만과 해안의 경치를 보며 결성 해미를 거쳐 안면도까지 들어간다. 가야산 서쪽에 있는 세고을이 바로 이 고장이다. 북쪽으로 태안과 서산이 있다. 이중환은 태안에서 바다 건너 강화도를 그려보고는 면천 당진을 거쳐 포구에서 배를 얻어 타고 아산으로 온다.

 

내포는 할 이틀 사이에 돌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지역을 돌아 보는데 만도 족히 보름은 걸렸을 것이다. 아산은 백제의 창국모 소서노가 아들 비류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착륙했던 약속의 땅이다 이중환은 마한 백제의 근원이 충청도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중환은 기자 조선을 말하고 마한 백제를 말하며 아산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전투 종군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이여송과 양호등의 명군의 수뇌부의 치졸한 주도권 다툼과 이를 해결 하는 명나라 조정의 처사를 보며 분노 한다.

 

이중환은 공주에서 다시 내포로 길을 잡는다. 유구에서 차령을 넘어 예산에 도착한 것이다. 예산에는 거상들이 있고 큰 시장이 선다고 했다. 예당평야와 조선 제일의 저수지인 예당호가 있으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 할까. 예산은 지금도 주 5일장이 아니라 주 5일에 두 번 장이 서는 전국 유일의 곳이다.

 

유궁진이 있어 배가 예당평야까지 들어오는 곳 예산은 충청도의 1번지다. 이중환은 예산에서 홍주를 거쳐 청양 정산 홍산으로 접어든다. 이름 하여 저산팔읍으로 온 것이다. 삼베는 예로부터 인삼과 더불어 조선의 전매품이자 특산품이었다. 전국 삼베의 3할을 생산 하던 곳이 충청 서남부의 8고을이었다.

 

   가도 가도 두메산골

   길 삼 하는 아낙 가련타.

 

정약용은 청양을 지나며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중환은 정약용과 더불어 성호 이익의 문도다. 그러데 이중환이 정산 청양을 지나며 무슨 일을 당했던 듯 하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한 그의 택리지에 느닷없는 독설이 튀어 나온다.

 

택리지에 정산 청양이 사람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부연 설명 없는 멘트가 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마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이 대목을 궁금해 하다 한 가지 짐작을 했다. 그것은 이중환이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중환은 사대부로 택리지 전편에 걸쳐 많은 유학자를 거론한다. 퇴계 성혼 남명 우암등이다. 이중환은 그런 대가들 말고도 권상하까지도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산을 지나며 사계 김장생을 빼놓고 있는 것이 이상 하다.

 

거슬러 올라 가 보면 정산 땅에 임진왜란 때 이몽학의 반란이 있었다. 이몽학이  정산 홍산 두 고을을 거점으로 사람을 모아 조정을 전복 시키겠다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몽학군은  정산 관아를 점거 하고 청양 남포 관아까지 공격을 하여 불을 지르고는 대흥군을 거쳐 홍주성으로 진격 한다.

 

왜군의 침략에 동분서주 하던 조정은 난리가 난다. 파천(?)이 따로 없었다. 기대했던 의병 신 대신 반란이라니...  이 때 정산현의 직전 현감이 사계 김장생이다. 후임자인 정대상은 난의 책임을 물어 참수를 당했다. 사계가 현감을 물러 난지 두 달만의 일이다.

 

김장생은 조정으로 부터 피난을 온 종친들을 잘 돌보아 주었다는 명목으로 상을 받기도 한다. 대유학자이자 청렴의 사표인 사계의 이미지와는 동 떨어진다. 이것은 기록이다. 선조수정실록과 정산현 선생안에 나온다.

 

이중환은 제도권과는 거리가 있던 아웃사이더다. 그는 당시 벼슬을 할 수 없던 전과자 신세로 정산을 지나다 하룻밤 신세를 지려다 지역의 선비들에게 봉변을 당했던 것일까. 당시 사계의 권위는 호서에서 대단할 때였다.

 

과거는 흘러갔다. 이중환의 평가대로 정산 청양은 사람이 살지 못 할 곳은 아니다. 칠갑산과 지천이란 청정을 무기로 지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이중환도 이 지역을 못내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는 내포가 좋다고 했다. 가로림만의 낙조나 오서산의 일출을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이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오서산의 고리싸리

  칠갑산의 고리싸리.

 

내포는 충청도의 모태다. 풍부한 물자로 기여를 했고 충의 절의로 보국을 했다. 웅진 시대도 사비 시대의 영광도 내포의 이런 기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중환은 자신의 호를 청화산인이라 했다.

청화산은 속리산에 있다. 다음편에는 땅위에 숨은 무릉도원 그곳으로 가 보자.

(다음 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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