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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의 역사 칼럼

4. 약속의 땅 한밭.

홍광표 기자 | 기사입력 2018/08/16 [20:59]

이청의 역사 칼럼

4. 약속의 땅 한밭.

홍광표 기자 | 입력 : 2018/08/16 [20:59]

▲    ©편집부

 택리지는 도발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이중환이 충청도 전 지역을 발품을 팔아 기록 했다고는 하나 정밀함이나 정보의 질이 신동국여지승람을 능가 할 수 없고 산세의 아름다움과 지세를 피력 했다고는 하나 정철의 관동별곡이나 윤선도의 구산구곡가를 뛰어 넘지 못한다.

 

그뿐인가. 이중한의 택리지 곳곳에 보이는 풍수 이론은 조선의 유행 풍수론이던 호순신론이나 명산론등에 비교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중환은 이들 정상급 정보와 문장 이론등에서 딱 한 발짝 물러나 자연과 문장과 풍수를 논하며 일류가 놓친 틈새 시장을 조명 한다. 이곳에 택리지의 의미가 있다.

 

강경은 생선과 소금을 사고 팔며 경기가 살아 있다. 한양과 조운이 연결 되고 내륙의 문물이 모여들어 흝어 지니 사람들이 매매로 돈을 벌어 부를 이룬다.

 

 

이중환이 지리와 풍수등을 살피기는 했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가 중국과의 문화 교류와 사대부들이 벌이는 시대적 갈등을 말하기도 했지만 진정 그가 하고자 한 말은 인간의 삶이다.

 

생선과 소금을 사고 팔며 심지어 외상 거래까지 하던 상인들의 정겨움과 믿음의 상술속에서 당대의 비합리적인 사회 체계와 고루한 유교의 인식 아래 골병이 들어 가던 조선 사회에서 한줄기 희망을 본것이다.

 

이중환은 사대부들의 치열한 정치 투쟁의 원인이 국가의 가난에 있다는 논지를 펼치며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와 백성이 함께 부강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가난한 집에서 인심이 날 수 없는 것이고 신선의 말같은 유교의 고담준론만으로는 결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충청땅에서 신이 내려준 땅으로 3곳을 꼽았다. 연기 전의와 유성펄(대전일대) 그리고 유마곡(유구 마곡사)이다.

 

 

거대령 사이를 작천이 서로 열리고 닫히며 흐르다 목천과 연기 사이에서 그치는데 이 부근의 산색이 아름답고 들판이 서로 싸고 돌아 감여가(풍수)들이 사람 살기에 적지라 한다.

 

 

이중환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의 조건으로 평탄한 지형과 교통로 그리고 조운(뱃길)의 조건을 우선 든다. 연기 전의 지역은 이런점에서 강점이 있다. 작천의 풍부한 수량과 인접한 금강의 존재 그리고 삼남을 연결 하는 접근성을 들어 살기 좋은 땅으로 꼽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그의 안목은 대단하다. 모든 이유를 떠나 250년 후 이 일대가 한 나라의 수도로 거론되며 급기야 행정 수도지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중환의 안목은 대전 지역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계룡산 남쪽에서 나온 물이 진산 옥계의 물과 합하여 갑천(甲川)이 되어 북으로 흐른다. 내의 동쪽이 회덕이고 서쪽이 유성 진잠이다. 동서 양편의 산들이 남쪽으로 들판을 감싸 안으며 북에서 서로 교차 하며 고리를 이루고 있어 산의 기상이 깨끗하고 배어나다. 특히 들의 남족에 보문산과 구봉산이 적당 하여 한양(동교)에 못지 않다.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최고의 땅으로 대전 일대를 주저 없이 꼽는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과

갑천의 길고 풍부한 물 그리고 지역의 남쪽을 지키는 보문산과 구봉산의 안정된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 하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중환이 지적한 이 일대가 훗날에 충청도의 광역도시로  발전을 했고 아이티 산업 단지와 연구도시로써 성장 한국의 5대 도시로 성장한 것을 보면 그의 예언이 신안(神眼)이라 할 만 하다.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10승지 두곳을 주목했다. 유마계곡과  속리산이 그것인데 그 지역 마저

대전의 땅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적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 전편에서 지리와 인간의 삶의 모습을 기록 하면서 풍수론을 기초로 사용한다. 알다시피 조선 사회에서 풍수론은 사회의 지배 이데오르기였다. 이중환도 이곳에서 자유 스러울 수 없었다. 택리지는 지리지라는 성격에 물상과 상업이 자연스럽게 담긴 250년전의 보고서다.

 

풍물지인가 하면 직산 천안 가도에서는 임진왜란의 치열 했던 전투 기록이 나오고 명군을 따라 왔던 명나라의 풍수객들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실재로 명나라의 대풍수객 채성우는  명나라 장군 형개를 따라와 정산현 백곡리에 있는 금반장의 명당터를 돌아 보고 그의 저서 명산론에 싣기도 했다.

이중환은 풍수론을 견지 하면서도 공리에 빠진 풍수를 비판 한다. 풍수를 사용 하되 풍수에 빠지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마곡을 돌아 보며 남사고를 거론한다. 남사고는 조선이 낳은 신인(神人)이다. 남사고는 유교와 불교의 또 다른 한축을 이뤄 3정을 이루던 조선 정신 세계의 한축인 감결 사상의 비조다. 10승지가 그로 부터 나왔다.

 

남사고는 풍수로 확연대오를 한 사람이다. 그는 풍수가 당대 발복이나 이장을 통한 개인의 영달을 추구 하는 것은 허접 쓰레기라 지적한다. 풍수가 한갓 개인의 영달과 이기를 위한 것이라면 허망하다는 것이다.

 

남사고는 풍수를 통하여 당대의 희망을 말한다. 예언으로 장치된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 말이다.

이점에서 이중환은 남사고의 충실한 후계자다. 이중환은 유마곡을 남사고의 주장대로 무릉도원이라 말한다. 성덕대왕 신종에 써 있는 지견도원(땅속에 숨어 있는 도원)에 부족함이 없다 했다.

 

유마계곡의 명산은 무성산(공주 우성면)이다. 무성산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이다. 무성산의 서북쪽과 차령산맥 사이에 유구 마곡사가 있다. 외부로 부터의 접근이 용이치 않으면서도 곳곳에 있는 들판이 기름지고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성산은 소설 홍길동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무성산 정상에는 지금도 홍길동성이라 전하는 성터가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공주에서 목사를 지낸적이 있다. 연산군 일기에는 실재하는 도적홍길동이 충청도를 공포로 몰아 넣고 있는 기록이 여러번 나온다.

 

이중환은 당대의 몰락한 사대부로 암담한 처지로 살았다. 당쟁의 패배자로 금강변으로 낙향을 하여 은인자중 하며 오늘을 포기 하는 대신 내일을 살고자 한 사람이다. 그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대에 주목 받지 못하던 재야였다.

 

택리지는 그렇게 쓰여 겨유 필사본만이 떠돌며 정약용 성호 이익 이가환등의 독후감에나 등장 하던

3류 저작이었다. 그런 그가 20세기를 맞아 다시 부활한 것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들게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이중환의 안목 때문이다. 충청도는 이미 이중환의 안목속에서 미래의 웅비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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