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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기획보도…제6탄, 춤으로 조선의 시대정신을 전한 한성준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7/15 [10:34]

[특집]탐사기획보도…제6탄, 춤으로 조선의 시대정신을 전한 한성준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7/15 [10:34]

한성준이 없었다면 한국 춤도 없었다

                                       내포신도시 대한민국 문화예술가로서 재조명 

 

 

 차종목(효 심리학/충남신문 칼럼 니스트)박사

 

한성준(1874~1941)이 없었다면 한국 춤도 없었다.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한성준(韓成俊,1875-1941)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관은 청주(淸州). 1875년 아버지 한천오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기 시절부터 민속예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왔다.

유년시절 외조부 백운채로부터 춤과 장단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그는 춤꾼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14세 때는 서학조에게서 줄타기와 민속예능을 배우고 홍성을 비롯한 서산, 태안 일대의 각종 연회, 굿판에 참가하여 전문적인 춤꾼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굿판에서의 경험은 후에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는데 기초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춤을 집대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자신만의 춤이 아닌 함께 숨쉬고 함께 동작하는 생생한 경험이 더욱더 그를 자신의 춤 세계로 구축하며 28세 때 전국 유랑길에 올라 독학수련으로 춤과 장단 등 민속 기예능을 연마하여 권번에서 무용을 가르쳤지만 서울에 정착해서는 한국무용을 계승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태평무, 승무, 학무와 같은 우리 춤을 무대화시키는 데 독보적으로 활동한 예술가이다.

31세 때에는 서울에 정착하여 원각사와 송만갑 협률사 등에 명고수로 출연·활동하였고, 조선 말에는 참봉 벼슬을 받고 고종과 흥선 대원군 앞에서 선뵈어 우리 고유의 춤을 정착시켰다.

 

 

한성준선생은 생전 여러 제자들에게 춤을 가르쳤으나 피붙이인 손녀 한영숙(韓英淑·1920~1989)을 유일한 무용 후계자로 지목했다. 1941년 한성준선생은 그해 세상을 떠났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40호 학무의 기·예능보유자인 한영숙은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 살풀이춤을 춰 찬사를 받았다.

 

 

한영숙은 할아버지 한성준에게 배운 전통무()를 이애주·정재만·김매자·정승희·김숙자 등에게 전수, 한국을 대표하는 춤꾼으로 키웠다. ‘춤의 사군자(四君子)’라고 불리는 학무(), 태평무(), 살풀이(), 승무() 등을 계승 발전시켜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한성준선생은 일제 강점기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흩어져 있거나 사장되어 가는 한국 고전무용을 집대성하여 계승·발전시킨 공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성준선생은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만주와 북만주를 돌며 조선인들을 격려했다. 당시 제자인 한영숙 등과 함께 만주공연을 나서면 조선인들이 몰려와 함께 어깨춤을 추고 아리랑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고 한다.

그에 관해 전하는 이야기 중에는일제강점기에 농기구나 악기 등을 모두 빼앗긴 조선인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솥이며 그릇을 들고나와 두들기면서 춤을 추어 언제나 눈물바다가 되었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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