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 집중 탐방
충절의 고장 충남은 서훈 1등급 독립 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독립운동의 고장이다. 그 중 자주와 독립의 정신적 지주는 이상재다. 월남(月南) 이상재는 1850년 11월 29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한산면 종지리에서 목은 이색 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박정양이 학부대신에서 내각 수반으로 임명되자, 『소학교령』을 발표한 데 이어 서울 소재 관립 소학교의 개교를 목표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사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1일에는 새로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교장을 겸직하면서 여러 나라와 교류 업무를 수행할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기르고자 교사 초빙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896년 2월 내각 총서(總書)로 옮기기 전까지 약 1년간 교육 부분에서 일하였다. 이 시기 학부아문(學部衙門) 참의와 학부 참서관으로 근무하면서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법관양성소 관제 등을 만들어 학교를 설립하였고, 114명의 양반 출신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했고 1906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도왔으며, 191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 YMCA운동에 전념하면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6월 윤치호 등과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할 것을 논의한 후 11월 26일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교 관제, 법관양성소 관제 등을 만들어 학교를 설립하였고, 114명의 양반 출신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924년 보이스카웃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少年聯合斥候隊)의 초대 총재와 1925년 9월 조선일보 사장으로 추대되어 인재양성은 그물론 민족 언론 문화 창달에 힘썼다. 1923년 7월에는 이승만이 운영하는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이 ‘모국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올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환영위원회를 만들어 요코하마(橫濱)까지 영접하러 사람을 보냈으며, 국내 도착 후 야구시합・연극・음악회・강연회・다과회 등을 개최하고 군수와 경찰의 협조를 받으며 방문활동을 하도록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4년 3월 소년척후단(小年斥候團)을 발족시켰으며, 1925년 보이스카우트연맹의 초대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이승만 계열과 YMCA 활동가를 중심으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흥업구락부 회장이 된 후, 조직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조선의 산업과 상업 발달을 위해 조선인 상공회를 조직하여 상공인 운동대회 개최를 지원하였다. 1927년 3월 29일 78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는데 당시 서울시민 25만명중 10만명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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