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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생활 윤리 불교인의 정치관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24/05/16 [09:12]

시민생활 윤리 불교인의 정치관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24/05/16 [09:12]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법제 하에서 이 정치하에서 권력자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이다. 우리는 다 같이 하늘의 시민이다. 땅에 살지만 하늘의 법을 지킨다. 하늘나라의 법을 지킨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이 땅의 시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땅의 법을 지켜야 한다.

 

이 두 문제로 갈등이 있다. 하늘의 법을 지키자니 땅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땅의 법을 지키자니 하늘의 법을 떠나는 것이 된다. 우리 하늘의 법과 땅의 법이 그것이 일직선상에 있을 때는 좋지마는 서로 충돌할 때는 나는 어느 쪽을 지켜야 하나 문제의 초점은 종교인은 이 세상에서도 한 국민, 한 시민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국가에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한다. 시민 된 의무를 다해야 한다. 모범 국민 시민이 되어야 한다.

 

종교인은 어떤 경우에도 반정부의 반체제니 하는 정부에 대한 부정적 자세는 합당치 않다. 종교인은 절대로 무력을 가지고 반정부, 반체제로 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행(萬行)을 하는 스님이 길을 떠나려 하자 노스님이 물었다. 세상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세상은 모두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저 바위는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마음속에 있습니다. 허 허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왜 무거운 바위를 담아 가려는가?

 

불교는 보통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에서다. 또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한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오히려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마음 모두 내려놓으면 그대로 부처이다. 이를 깨침이라고 한다. 만행을 하는 스님에게 노스님께서는 이를 지적한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를 만들어 놓고 문제를 풀려고 한다.

 

북미회담이 결렬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쪽에서는 다행이라고 안위한다.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의 시비(是非)를 모두가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정의라고들 한다.

 

불교를 보는 사람들 가운데 왜 스님들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될 것이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따진다.

 

할 말은 많으나 우선 하나만 지적하고자 한다. 불교와 스님들은 분별(分別) 인과(因果)의 흐름에 간섭과 시비를 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습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그 자체이다. 바닷속에 있는 생물들이 살아가는데 간섭을 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바닷속에 어떤 정의와 불의 어떤 시시비비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따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자연은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 그들만의 생존방식 그리고 그들만의 법칙으로 살아간다. 어떤 기준으로 간섭하겠는가? 오히려 가만히 놔두는 것이 그들을 위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역시 인과의 굴레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겨남으로 영원히 상대적인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끊을 수가 없다. 정의는 불의를 의지하고 불의는 정의를 의지하므로 누가 정의라고 누가 불의인지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다.

 

화합과 사랑, 협상과 타협은 공업(共業)에 의한 일시적인 시절 인연일 뿐이다. 상대적인 현상은 좋은 때가 있으면 좋지 않을 때가 반듯이 생기는 인과의 현상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영원히 해결할 수가 없다.

 

지구가 생긴 이래 수 만년 동안 완전한 평화나 행복은 없었다. 모든 모습은 인과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은 각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분별(分別)의 인과를 벗어나서 마음을 깨쳐야 비로소 시시비비가 없는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된다. 이를 자타(自他) 일시(一時) 성불(成佛)이라고 한다.

 

내가 깨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이든 분별(分別) 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져야 모든 것이 해결되므로 분별없는 마음을 깨치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는다 해도 이는 상대적인 분별의 내용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인과의 현상일 뿐이다. 

 

마음도 감정도 기분도 마찬가지다. 노스님의 말씀처럼 왜 마음 안에 잔뜩 무거운 짐을 넣고 있단 말인가. 좋고 싫고 고락분별(苦樂分別)의 짐을 비우고 또 비워서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뿐이다. 역사가 부르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과 사명을 지닌 존재인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떤 책임과 권리를 지닌 존재인지 곧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시대정신으로 사는 참 지성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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