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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란 토지개혁 실상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24/05/29 [14:17]

6.25 전란 토지개혁 실상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24/05/29 [14:17]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임금의 하늘의 백성이다. 농지개혁은 한 사회에 커다란 변동이 생길 때, 사회개혁적(社會改革的)인 의의에서 실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토착지주(土着地主)인 재산가들이 자기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의 이익과 배치되는 행동을 취하여, 이적행동(利敵行動)을 하는 일이 많았던 까닭에 그들의 세력을 막고 재산의 편중을 피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였다.

 

2차 대전 후는, 약소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민주주의 정신을 국민에게 깊이 침투시키고, 봉건적인 유습을 타파하고자 세계의 대다수 국가에서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것은 농민 즉 소작인은 지주에게 의지한 반노예와 같이 얽매어 왔기 때문에, 민주 발전에 지장이 많으므로 농민의 반노동적(半勞動的)인 지위를 해방하여, 독립된 인간 생활을 부여하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무상(無償) 또는 유상(有償)의 방법에 의하여 경작자 자신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한국에서는 더욱 농지개혁의 실시가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초반 정약용(茶山)의 분석에 의하면 전라도는 대지주가 5%, 자작농 20%, 소작농이 75%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815 직후의 남한 인구 19백만 명 중 한국 인구 구성에서 농업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정과, 또한 2백만 농가 호수 중에도 자작 겸 소작농(自作 兼 小作農)37.9%이고, 순 소작농가의 43.2% 이어서 소작 관계로 있는 농가가 전 농가 호수의 80%를 넘는 셈이 된다.

 

이러한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 층이 봉건적인 토지 소유관계 하에 반농노적인 처지에서 가난하고 무식하여 정당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하는 동안에는, 즉 진정한 의미에서 이 나라의 민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대한민국의 향상 발전을 위하여, 농지개혁을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 86조에도 이것을 명시하여, 보장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다음 해인 1949421일에 국회를 통과하여, 여러 차례의 자귀수정(字句修正)과 조문정리(條文整理)를 한 다음, 동년 621, 법률 31호로 공포하였다.

 

이 한국의 역사적 과업은 1950325, 시행령 294호와 시행규칙 농림부령 18호를 동년 428일에 각각 공포함으로써 시행 단계에 올려놓았던 것이며, 5월부터 분배실시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못한 625 동란으로, 일단 중지 상태에 빠졌으나, 피난정부는 그 피난지역에서도 농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928 수복 직후에도 성의껏 농지분배사무를 추진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북한이 준비해 내려온 토지무상분배선동 남조선토지개혁법이 남한 농민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이미 실시되고 있는 한국의 농지개혁은 공산침략과 그 선전 공세에 대비하는 중대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신생 조국의 진로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체제로 설정한 그 선견지명이야말로 오늘날 세습 독재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 북한 동포를 생각할 때 얼마나 위대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나를 새삼 깨닫게 한다. 또한 건국과 동시에 서둘러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이 전 국민의 80% 넘던 시대에, 그 가운데서도 절대다수이던 소직인 들을 모두 지주(地主)이자 자작농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영단이 우리 농민들의 애향심과 근로의욕을 크게 북돋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 북한이 625 남침을 해왔을 때 온 국민의 결사항전을 이끌어 내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한편, 토지개혁 당시 유상몰수(有償沒收) 유상분배(有償分配)의 원칙에 따라서 모든 지주들에게는 정부가 땅값을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해서 교부해 주고, 농민들에게는 앞으로 생산되는 작물로 현물세 25% 임대료 5%씩을 평균 15년간 정부에 분할 상환토록 했다. 여기서 토지를 분배받아 소유하게 된 농민들이야 당연히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했지만, 땅임자인 지주들은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금쪽같은 자기 재산을 대개는 조상적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온 전답을 거의 헐값에 그것도 현금이 아닌 증권으로 받고 빼앗기다시피 내놓았다. 하지만 그 당시 지주들은 아무런 조직적인 반발도 저항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땅을 내놓았다. 이것은 특이하기 그지없는 일로서 여기에도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특히 가진 자의 감성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당시 토지개혁을 주관했던 농림부 조봉암 장관은 공산주의자로 재판받고 처형되었다. 대한민국이 실시한 19505월에 착수 실시한 토지개혁은 625 전란으로 중단되었다. 그래도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하는 공작에 농락당하는데 대비한 용단이었다. 농민의 민주화는 그 열매를 맺었으며 따라서 농지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의 선제공세를 막을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19462월에 서둘러 북쪽 지주들의 모든 소유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무상분배의 원칙에 의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러나 농민들 개인에게 분배되지 않고 모두 공산당이 소유하게 된다.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을 한다며 종교단체의 모든 토지를 강제 몰수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불교, 천주교 등 4,124개 종교단체가 4,500만 평의 토지를 빼앗겼다.

 

195078일부터 925일까지 79일 동안 남한 농민들이 겪었던 북한 공산당 농업정책 실상은 이랬다. 북한은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개인소유 농사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협동농장에서 각종 농산물을 공동노력으로 재배하여 수확 후 종자대(種子代) 3%, 사료대(飼料代) 1%, 화학비료대 4%, 농기계 사용료 2%, 관개사용료(灌漑使用料, 저수지물 사용료) 4%, 농기구 구입비 10%, 협동농장 시설 확장비(공동축적비) 30%, 관리운영비(사회문화기금) 7%, 원호기금 1.5% 등 총계 62.5%를 공제한 후 나머지 37.5%를 가지고 사회주의적분배제(社會主義的分配制)에 의하여 해당 농민의 노력점수(勞力日)를 기준으로 협동농장 총회에서 결정하여 현물 및 현금으로 분배(分配)된다.

 

농민위원회 위원들은 농민들이 경작한 농산물에 현물세(現物稅)를 부과하기 위하여 논과 밭에 경작(耕作)되어 결실 중에 있는 조, 수수, 벼 등의 곡식 이삭의 알맹이를 세러 논과 밭으로 다니기도 했다. 협동농장에서 생산한 것은 모두 분배 대상물이 될 수 없으며 벼,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은 분배물이며, 콩은 소량만 분배하고 전량 국가에서 수매(收買)하고 면화(목화), 담배, 인삼, 누에고치는 의무적으로 국가에 수매하여야 하고 팥, 녹두, 피마자(아주까리), 대마(大麻) 등은 양이 적다는 이유로 전량 수매시킨다. , 옥수수와 감자의 환산비율(換算比率)14로 벼, 옥수수 각 1kg에 감자 4kg으로 환산한다.

 

국군 유엔군은 해방군이었다. 그해 가을걷이를 북한 공산당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늘이 도와주셨다. 농민들은 악몽 같은 가슴 아픈 고난을 겪었었다. 6.25 전란 직전 대한민국 농지개혁은 국민 주권 국가 건설의 물적 토대가 된 위대한 농지개혁 용단의 진실이다.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다. 나라가 힘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역사를 빼앗기고 얼을 도둑맞았어도 백성들은 민족을 붙잡고 살아온 역사가 있다. 땅을 지키며 토지를 놓지 않으려 했다. 다 빼앗겨도 토지를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땅은 민족이었다.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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