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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傘壽>는 나이 80을 이르는 말이다. 금년 80을 맞아 <산수 기행> 책을 작년 12월 탈고했다. 책은 3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판돌의 산수 이야기, 2부는 여섯 돌 이야기, 3부는 동창회와 내가 추천하는 강희일 사장 이야기로 엮었다.
내가 태어나고 중학교 졸업까지 충남 당진군 전형적인 고향마을 가재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진학하여 고향을 떠났지만 동생이 고향을 지키고 있고, 선산이 있으며 고향 동창회 모임 등으로 평균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향을 찾는다.
고향의 우리 집은 아미산 줄기 몽산 남쪽에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몽산은 면천중학교 교가에 나오는데 앞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들판과 조그만 개천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평화롭고 아늑한 농촌마을이다. 오늘은 판돌의 어릴 적 산토끼와 송충이 잡던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쯤 전, 시골의 봄과 겨울은 산에서 시작해 산으로 끝났다. 마을 뒤 야트막한 산은 우리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산토끼를 쫓고, 송충이를 잡으며 자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우리는 4-5명이 어울려 산토끼를 잡았고 한 겨울에 한두 번 전교생이 산토끼를 잡으러 학교 뒷산을 헤매기도 했다. 눈이 쌓인 겨울에 동네 친구들 몇 명이 그 험한 산을 누비며 토끼를 잡은 것은 대단했다.
4-5미터 쯤 되는 배구네트를 산 정상 부근에 쳐놓고 “워이~ 워이~” 소리지르며 토기를 몰아가면 신통하게도 산토끼가 그 좁은 그물 사이에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껍질을 벗겨 귀마개를 하고 맛있게 토끼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겨울 동안 대여섯 마리의 토끼가 제물이 되었다.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송충이를 잡아야 한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명령이었다. 전교생이 미리 준비한 깡통과 장갑을 준비해 빈 강통에 가득 잡아 선생님 앞에서 확인을 받아야 했다. 송진 묻은 손으로 잡은 그 작은 생명 하나가 사라질 때 숲은 더 푸르게 남았다.
송충이를 잡는 일은 징그러운 일이었다. 송충이를 잡는다고 예고된 날에 여학생은 송충이 잡는 것이 징그럽다고 결석한 일도 있었다. 솔잎 사이에 매달린 송충이는 소나무를 병들게 했다.
우리는 막대기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고, 송충이를 떨어뜨려 잡아냈다. 징그럽다는 말보다 “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먼저였다. 그 때의 우리는 자연을 지키는 가장 어린 일꾼들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 시절은 가난했으되 허전하지 않았다. 먹을 것, 즐길 것은 부족했지만 하루는 길었고, 자연은 늘 곁에 있었다. 산토끼를 쫓던 숨죽인 순간과 송충이를 잡던 묵묵한 손길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산수 기행은 결국 내가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60년대 말 산토끼와 송충이가 말없이 보여준 그 장면이 없었다면 나는 ‘함께산다’는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희생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까지 조용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이제 산은 멀어졌고, 아이들은 산토끼를 쫓지 않는다. 봄과 겨울이 되면 시골 산을 오르내리던 그 시절 그리움은 부질없는 생각일까? <저작권자 ⓒ 충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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