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부산을 함락한 왜병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했다. 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너무 큰 것에 질려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15일 송상헌이 동래성을 지키려고 사투하다가 전사했다. 그 후 적의 위세에 질려 도망치는 장수가 많았다. 수령들도 관직을 버리고 도망쳐서 민심이 흩어졌다. 왜적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상주에 들어오게 되었다. 상주 목사 김해는 순변사를 줄참에서 기다리겠다고 해 놓고 산속으로 도주했다. 상주가 적의 손에 들어가면 청주가 위태롭고 청주가 무너지면 서울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위기에 처한 조정은 당시 서인(西人)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장수로 인정받던 신립이 자진하여 출정을 요청했다. 신립은 순변사가 되어 충주로 출정했다. 당시 신립과 함께 조정 집권 세력의 후원을 받던 이일도 신립과 같이 조선 최고의 장수로 알려졌다. 적어도 서인(西人)에게만은.
이일은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 전투에서 막아야 했다.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왜적을 단칼에 무찌를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왜군이 선산을 지나고 있으며 적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소식을 전한 개령현 사람을 군사의 마음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아침에 목을 베었다. 이일은 개령현 사람의 소식을 들은 날 밤에도 척후병을 띄우지 않았다. 개령현 사람 목을 베고 얼마 지나지 않자 왜적이 들이닥쳤다. 왜적들은 밤새 행군하여 상주에 도착한 것이었다. 상주 전투에서 이일의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옷을 벗어버린 채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알몸둥이로 달아났다. 이일은 문경에 이르러 종이와 붓을 찾아 패전 상황을 임금께 아뢰고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충주로 달려갔다. 이일의 패전 소식을 들은 조정은 왕을 설득하여 피난할 것을 종용하고 피난 채비를 차렸다. 선조와 윤두수 등은 오로지 자기 목숨 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신립은 도망친 이일의 목을 베려다가 쓸모 있다고 여겨 살려 주었는데 나중에 군사들의 충성심이 흩어지게 하는 꼴이 되었다.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여 군영을 살폈다. 신립이 충주 오니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서 군사들이 모여 8천명이 넘었다. 신립은 조령을 지키고자 했으나 이일이 상주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여 충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일, 변기 등을 불러 모두 충주로 오도록 했는데 적군을 막기 좋은 험준한 조령을 버리고서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장수와 군사들을 호령만 하니 보는 사람들은 신립이 패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립은 군관 하나가 와서 적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은밀히 보고했는데 이때가 27일 초저녁이었다. 이 말을 듣고 신립이 갑자기 성 밖으로 뛰어나가자 군중이 매우 요란해졌으며 신립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밤이 깊은 뒤에야 몰래 객사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군관이 거짓말을 했다 하여 목을 베고 임금께 글을 올리기를 “적군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으나 적병은 이미 10리 안에 와 있는 것을 신립은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을 접한 신립은 군사들을 탄금대 앞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치고 대응했는데 왼쪽에는 논이 있고 물과 풀이 서로 얽히어 말과 사람이 달리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조금 후에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쳐들어오는데 그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신립의 군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군의 기세와 총소리에 눌려 허둥대다가 물속에 뛰어들고 총에 맞아 후퇴하며 강물에 뛰어들었다. 신립은 당황하여 말을 달려 몸소 적진에 돌진하려 했으나 쳐들어가지 못하고 군사들과 같이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모든 군사는 강물에 떨어지고 뛰어들어 시체가 강물을 덮고 떠내려갔다. 김여물도 혼란한 군사 속에서 죽었으나 이일은 동쪽 산골짜기에서 빠져나와 도주했다. 그렇게 왜군을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신립은 탄금대에서 패전하고 모든 군사와 함께 수장되었다.
뒷날 명나라 장수인 제독 이여송이 왜군을 추격하여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렇게 험준한 요새가 있었는데 지킬 줄 몰랐으니 신총병(申摠兵-신립)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다.” 조정 집권 세력이 그렇게 비호한 신립은 평소에도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길을 닦게 하고 그에게 지나칠 정도의 대접을 했다. 신립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충주로 떠나려고 대궐 문밖에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위의 이야기는 임진왜란과 신립의 탄금대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를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 에 나오는 내용과 임진왜란에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신립은 실제 북방 전투에서 공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람됨과 장수로서의 인격과 지략은 모자란 사람이었다. 매사에 호언장담하였고 신중함이 부족했다. 왕과 자기 파당인 서인(西人)에 충성심은 강했으나 백성의 노고는 알지 못했다. 반면에 이순신은 늘 조심하였고 승리를 장담하지 않았다. 매사를 신중하게 살피며 백성의 편에 섰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면서 권율 장군을 찾았을 때 권율이 ‘무슨 방도가 있는가?’ 라고 묻자 ‘없습니다. 삼도(三道)를 돌아보고 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고 했다. 그런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150척의 왜군을 격퇴했다. 명량해전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자신의 전략과 전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 도왔다’고 했을 뿐이었다.
전시에 장수가 용맹하기만 하고 오만하면 정보에 어두워지고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고 남의 얘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전투에 패배하고 민심은 흩어지기 쉽다. 신립은 용맹하기는 했으나 겸허하지 못했고 독단적이었다. 전시에는 비록 적의 작전도 필요하면 사용해야 한다. 신립과 같은 용맹은 아무 쓸모가 없는 용맹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코로나 19로 전시와 같은 처지에 있다. 대통령과 정부 요인 그리고 여당은 마스크 공급 문제 하나에도 혼란을 거듭하면서 중간 평가를 하면서 방역과 검역 등이 성공이고 세계적인 모범사례라면서 자화자찬했다. 산불이 났을 때 아주 중요한 것은 잔여 불씨를 제거하는 일이다. 잔여 불씨에 방심하면 언제 어디서 또다시 큰불로 번질지 모른다. 코로나 19가 서울을 뚫었다. 서울은 우리나라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코로나 19와의 전투는 이제야 본 전투에 돌입했는지 모른다. 코로나 19가 또다시 언제 어느 곳에서 기습해 올지 모른다. 그래서 자화자찬과 호언장담은 금물이다. 지금 신립의 호언장담과 탄금대의 최후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저작권자 ⓒ 충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칼럼·오피니언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