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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기획보도…제8탄, 천민 신분을 극복한 장영실

조선 천재 과학자 장영실…간의, 혼천의, 물시계, 앙부일구 등 발명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7/28 [15:52]

[특집]탐사기획보도…제8탄, 천민 신분을 극복한 장영실

조선 천재 과학자 장영실…간의, 혼천의, 물시계, 앙부일구 등 발명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7/28 [15:52]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성  향(효학박사)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의 이름이 찬연하게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만 원짜리 지폐에는 앞면에 세종대왕과 함께 뒷면에는 조선의 과학기술을 최고로 만든 15세기 조선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업적인 혼천의(천문관측기)가 그려져 있다.

 

 

장영실(蔣英實, 1390? ~ 1445?)은 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로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 즉 관기(官妓)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되어 장영실은 어머니 신분을 따라 노비 신분이었으나 엄격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다.

 

아산 장영실 과학관 앞에 자리하여 건립된 장영실 동상에서도 매 순간, 뜨겁게 열정을 불살랐던 그를 느낄 수 있듯이 장영실의 과학의 힘은 오늘날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소행성 68719호에 장영실(Jangyeongsi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며 아직도 그는 별빛을 반짝이며 우주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세종 4) 윤사웅(尹士雄)과 더불어서,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1년간 명의 천문학을 익힐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은 본격적으로 물시계와 천문관측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게 했다.

 

장영실은 혼의성상도감(渾儀成象都監)에서 장영실은 3년을 뼈를 깎는 노력한 끝에 물시계와 천문기구의 골격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1425년 세종은 장영실의 종 신분을 벗기고 첨지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물시계 연구에 열중하라고 했다.(연려실기술, 천문전고)

 

 해시계(앙부일구)

그의 기술적 재능이 인정되어 별좌라는 정품의 직위를 얻어 궁궐 기술자로서의 관에 소속된 장인 신분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궁중에서 연구와 발명에 열중하게 되었다.

 

1432년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 제작계획에 착수하여 간의(簡儀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고, 1437년 대간의·소간의 및 휴대용 해시계를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등을 만들었다.

 

1434년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여, 그 공로로 대호군(大護軍)에까지 승진하였고, 1438년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또한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임금의 수레가 부서진 사건으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풍기

세종대왕은 애민 정신과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발탁하는 성품을 지녔기에 장영실의 과학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가 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임금의 수레가 부서진 사건으로 파직당한 일은 군신 간의 신뢰를 재삼 생각해 보게 한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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