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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 기획보도…제13탄, 난세(亂世)의 진정한 영웅(英雄) 홍가신!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8/31 [14:50]

[특집]탐사 기획보도…제13탄, 난세(亂世)의 진정한 영웅(英雄) 홍가신!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8/31 [14:50]

 

이수경(시조 시인/덕향문학 사무총장)

 

만전당(晩全當)홍가신 선생(1541~1615)1541(중종 16)에 아버지 장원공 온과 어머니 흥양신씨 사이에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난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정치가이다.  

 홍가신 영정(조선중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만전당 홍가신 선생이 64세때 그려진 그림을 신해년(1791년 추정)에 베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을 일으켰고, 1596년에는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허엽, 민순의 문인으로 서경덕의 재전제자이며이황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중종 때의 재상인 홍언필홍섬은 각각 재종조부와 재종숙부가 된다. ()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만전(晩全), 간옹(艮翁), 본관은 남양이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만전당 홍가신은 성리학자로도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선조 431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36년간 부여현감, 수원부사, 파주, 홍주, 해주목사, 개성유수를 지냈다.

 

 

목민관으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했던 홍가신은 임진왜란으로 외적이 출몰하자 배를 준비하고 처자를 피난시킬 준비를 하는 다른 고을 수령들과 달리 홍가신은 적의 수중에 들어간 지역으로 모두가 회피하는 파주목사로 파견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의병들과 함께 왜군에 맞서 사수할 준비를 하자 측근에서 피난 갈 것을 권유하자 다음과 같이 일갈을 했다.

적이 침입하여 환란이 있으면 신하는 국가를 위해 죽고 처자는 가장을 위해 죽을 뿐이다. 미리 처자를 대피시키고 능히 국토를 지킬 자가 있단 말인가?

죽기를 각오한 그의 결연한 의지는 홍주성을 왜구로부터 지켜냈다.

 

임진·정유재란(壬辰·丁酉再亂)은 우리민족 초유의 장기 전란(戰亂)으로 조선의 8도 전역을 전장화 하였고, 전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사대부들은 국가와 백성들은 나몰라라 하고 먼저 도망가기 바쁘고 궁궐은 왜적이 침입하기도 전에 노비들의 손에 불태워지는 등 혼란은 극에 달하였으며, 관군들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적들에게 속수부책인 상황에 민심은 흉흉해 지고 이 아수라장을 틈타 지방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 조정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홍가신은 결연한 의지로 홍주성에 대한 왜군의 침략을 막고 민란을 막는데 성공한다.

 

 



이몽학의 난

 

이몽학(李夢鶴,? ~ 1596)  낙향한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이몽학의 난(李夢鶴-)은 규모면에서 가장 큰 민란으로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혼란을 틈타 충청도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왕족이 서얼출신 있었던 이몽학은 한현(韓絢)등과 조직한 동갑계원 700여명과 무량사에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깃발과 무기를 만들고 훈련을 하며 난을 준비한다. 임진왜란 이후 대기근으로 굼주렸던 농민들을 선동하여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반란의 명분을 앞세워 삽시간에 수천 명의 무리를 만드는데 성공한 이몽학은 홍산,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휩쓸고 서울로 향하는 도중 홍주(홍성)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반란군은 이미 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때 홍가신은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부하들을 거짓으로 투항시켜 적정을 살피며 시간을 벌어 만반의 공격준비를 갖추는 치밀한 방어계획을 수립해 민병을 동원하여 최호(崔湖)의 수군과 함께 반란군을 공격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홍주현(현 홍성)목사였던 홍가신은 뛰어난 기계와 충의(忠義)로 난()을 진압하는데 남다른 공을 인정받아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만전당 홍가신은 치사(致仕) 후에도 왕으로부터 극진한 공신의 예우를 받았으나 군은에 감읍하면서도, 겸손해하는 예를 끝까지 잃지 않고, 병환으로 1615년 별세할 때까지도 군은(君恩)의 뜻에 정중한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의 청렴결백하면서도 굳은 기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희사하는 바가 크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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