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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3.1만세운동 시대정신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14/03/01 [15:43]

자랑스러운 3.1만세운동 시대정신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14/03/01 [15:43]
▲     © 편집부
1919.3.1.독립만세운동은 거족적인 자랑스러운 세계가 놀란 조선민족 독립 평화운동이었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려는 민족자결 운동이고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이었다. 1860년 일본이 일찍이 사무라이들을 해외유학을 시켜서 일찍이 근대 문명화를 추진한 것을 보면서 우리민족이 한발 늦은 대가가 너무도 큰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인도 간디가 불복종 대중 운동을 시작 한 것도 같은 해 1919. 4. 6 이었다. 중국도 북경에서 대학생들이 주동하는 주권 학생의거가 1919. 5. 4 일어났다. 우리 조상님들도 세계 만방에 자주독립 민족으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1919.4.30. 미국 기독교 연합회 동양문제 연구위원회의 보고서에 “예수교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족이다”라 기록됐다. 우리 조상들은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다. 3.1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승화시켰다. 젊은 이상재 선생이 투옥되어 모진 고통을 치를 때 누가 이일을 시켰느냐고 누가 만세운동을 시켰느냐고 심문하며 매질을 할 때 그는 시종 여일하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시켰소.” “하나님이 시켰소.” 이 신앙고백이 한국 교회의 부흥의 뿌리가 됐다. 3.1운동은 이 땅에 복음을 신속하게 전파시키려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3.1운동이 없었다면 2차 대전이 끝났다 해도 우리는 일본에 편입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3.1운동이 있었기에 온 세계가 우리를 가리켜 살아있는 민족이라고 독립된 국가로 민족으로 인정하게 됐다.
 
나라도 교회도 3.1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거룩하고 귀하고 자랑스러운 3.1운동을 일으킨 백성이며 자랑스러운 조상의 후예이다. 3.1운동 민족 독립운동은 기독교가 중심이 된 평화운동이었다. 서울 중앙YMCA간사 박희도(감리교)가 감리교계 지도자들을 오산학교 이승훈 장로(장로교)가 장로교계 지도자들의 뜻을 모아 합력을 이루었다.
 
기독교계에서 추진해 온 만세운동 계획과 천도교에서 계획 추진해 온 만세운동이 단일 체계 민족운동으로 통합된 거사였다. 기독교에서는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비폭력적으로 진행하는 평화적 운동으로 주장되었음으로 천도교의 혁명적 무력 항쟁방법으로 추진하는 종교와 합세 할 수 없었다. 천도교가 기독교 주장을 받아 드리므로 비폭력 평화 민족운동으로 단일 통합하여 계획 추진하게 됐다.
 
3.1민족 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고 기독교 16명중 감리교 9명, 장로교 6명으로 민족대표 33인중에 천안읍 감리교회 담임을 역임한 목사는 신흥식(1916), 최석모(1927), 신석구(1935) 목사이다.
 
천안서릿말 천안읍교회 담임 안창호 목사(감리교천안지방감리사 역할)는 북면 매송교회, 수신면 장명교회, 병천면 지령리교회, 입장면 양대 광명교회, 입장교회, 성환면 율금리교회 등을 순방 집회하며 독립정신을 일깨워왔다.
 
긴밀한 조작 연락은 서울 이북 쪽은 장로교, 서울 남쪽은 감리교가 맡았다. 중부지방 연락책은 수원 삼일학교 교사 김세환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문 낭독 만세운동 거사 연락을 받고 천안지방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3월 14일 목천을 시작으로 3월 20일 입장 광명학교, 3월 28일 입장 광부만세, 3월 29일 천안장터, 3월 30일 풍세, 3월 31일 성환 그리고 4월 1일 병천 장터로 확산되었다.
 
일제 헌병의 보고에 의하면 목천 2명 훈방, 입장 3인 순국 실형, 12명 체포, 기소중지 38명, 천안 26명 체포, 실형 4명, 병천 순국 20명 실형 동면 계 19명, 수신면 계 7명이다.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총 시위회수 11회, 참여인원 6,400명, 사망자수 82명, 파상인원 70명, 투옥인원 189명이다. 사망자 82면 중 23명만 확인되고 있다. 조선 5백년간 총치자의 이념이 되어 있던 봉건 전제 정치 도덕이 무너지는 시대정신 발흥이었다. 단발령, 동학농민 혁명 등 민중의 근대 개혁을 가로 막던 전근대적 장벽이 무너지는 새 역사의 노도였다. 민중화시대 민주주의 시대 평등 인권 새로운 사조의 여명이 도래하는 시대 조류였다.
 
민족대표 33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선언문 배포는 전문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다. 정동교회에서 독립선언문 배포 행동대 학교별 대표자 회의를 했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대학생들 중에는 천안 출신 경성공업보습학교 대표 봉재룡(경성공보 2), 선린상업학교 대표 남정채(선린상 2) 2인도 있었다. 그들은 천안 영정보통학교(천안보통학교, 천안읍교회 교인) 제5회 졸업생이었다.
 
3.1독립만세 운동은 자랑스러운 민족혼을 일깨우는 평화운동이었으며, 민족 자주독립 운동, 개화개명 시대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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